이중섭, 백년의 신화

By on 2016년 12월 7일

전시정보 INFORMATION

  • 전시명

    이중섭 , 백년의 신화

  • 전시기간

    2016-10-20~2017-02-26

  • 전시장소

    부산시립미술관 2층 전시실

  • 관람시간

    (평일, 일요일) 10: 00 ~ 18:00
    (토요일, 매월 마지막 수요일) 10:00 ~ 21:00
    휴관일 : 1월 1일, 매주 월요일 (단,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을 휴관일로 함)

  • 참여작가

    이중섭 LEE JUNG SEOP

  • 전시작품

    50여개 이상의 소장처에서 모은 이중섭의 유화, 수채, 드로잉, 은지화, 엽서 등 작품 총 200여점

  • 관람료

    성인 7,000원, 유아·초·중·고 4,000원, 만 7세 미만 유아와 65세 이상 시민을 포함한 대상자에게는 입장료가 할인, 면제

전시내용 및 구성

부산시립미술관(관장 김영순)은 이중섭(1916-56)의 탄생 100년, 작고 60년을 맞 아 ‘이중섭, 백년의 신화’전을 개최한다. 이번 전시는 산재해온 이중섭의 작 품을 가능한 한 한 자리에 모아 시민들이 함께 감상하면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가장,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중섭의 면모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도록 하였다.

이번 전시는 부산이라는 장소성을 통해 그 특별한 의미가 부각된다. 부산은 이 중섭이 가족과 이별하고 힘겨운 피란생활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. 그러한 가운 데에서도 그는 은지화 형식을 완성하고 각종 전시회에 참여하는 등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 남은 피란지에서의 외로운 삶을 예술의 향한 열정을 통해 이겨나 갔다.

이중섭은 ‘국민작가’로서 1970년대 이후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. 소 와 어린아이와 같은 소재는 물론, 그의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은지화 등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이지만, 41세라는 짧은 생애와 전란 이후 피 난생활 5년여의 한정된 시기에 남아 있는 작품들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
는 없었다. 그러한 점에서 국공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첫 전시로서 한국 미술관 전시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.

50여개 소장처로부터 대여한 200여점의 작품과 100여점의 자료가 한 자리에 모 인 이번 전시에서는 <황소>, <길 떠나는 가족>, <욕지도 풍경> 등을 비롯한 대 표적인 유화작품 외에 은지화, 드로잉, 엽서화, 편지화, 유품 및 자료 등을 총 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. 엽서화와 편지화는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 과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어 이중섭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느끼고 공 감하게 할 뿐 아니라, 우리로 하여금 가족애를 되돌아보게 한다.

바닷가의 아이들_1952-53년_종이에 연필 수채_32.5x49.8cm

□ 이중섭과 부산

부산의 영도와 광복동, 범일동, 문현동 등지에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과 홀로 남은 외로움을 예술을 향한 의지로 극복하고자 했던 화가의 자취가 남 아 있다. 특히 당시 피난민촌이 들어섰던 범일동에는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건너 와 머물렀던 이중섭을 기억하는 이중섭거리와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. 전시 된 작품들 가운데는 부산 피란시절 이중섭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피란시절 부산 의 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는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.

이중섭 예술을 이루는 중요한 성과의 하나가 은지화이다. 은지화는 담배를 싼 은박지 표면을 새기거나 긁고 물감을 발라 닦아냄으로써 긁힌 자국에 남은 물감 의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. 고려시대에 유행한 금속공예의 은입사(銀入絲)나 상감청자 기법을 연상케 하는 은지화는 전통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작가 의 의식을 잘 보여준다. 이러한 은지화의 형식적, 기법적 완성은 그의 부산시대 에 이루어진다.

한편으로 이중섭은 피난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부산에서 개최된 신사실파전, 기조전 등에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. 이러한 점에서 부산은 그의 예술적 전개를 연구하는 미술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라 할 것이다.

《제 1 전시실》

1부. 1916-50 평원, 평양, 정주, 도쿄, 원산

이중섭은 1916년 9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. 이후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, 1937 년~1941년 일본 도쿄의 ‘문화학원’에서 수학했다. 그리고 일본의 미술단체였던‘자 유미술가협회’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화가로 등단했다. 1950년 12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란을 내려오면서 그 때까지 제작된 작품 들은 거의 원산에 남겨졌다. 따라서 이 시기 작품들은 일본 유학기의 애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, 원산 시기 해방직후 제작된 연필화 등이 전시된다.

세사람_1945년경_종이에 연필_18.2x28cm

2부. 1950-53 서귀포, 부산

1950년 12월 남한으로 내려와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란시절을 보냈다.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보낸 1년간은 매우 가난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하며 좋은 작품을 남겼다. 이후 부산으로 돌아와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. 이 무렵 제작된 작품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물고기와 노는 풍요롭고 행복한 장면들이 많았다. 이번 전시에는 <봄의 아동>, <물고 기와 노는 세 어린이> 등 어린아이와 동식물들, 자연의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진 환상적인 작품들이 나온다.

3부. 은지화

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.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 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,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 게 된다.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,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 품이 된다.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.

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, 그 중 약 40여점의 수준 높은 은지화 작품이 전시장에 진열되었다. 또한 작은 은지화를 기가픽셀 촬영하여 16미터의 벽면에 영상으로 구현하였다. 이중섭은 후에 이 은지화들을 밑 그림으로 ‘벽화’를 그리고 싶어 했는데, 그의 꿈을 현대의 영상 기술로 보완한 것이다.

《제 2 전시실》

4부. 1953-54 통영

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년 6월경까지 이중섭은 공예가 유강렬(1920~76) 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며,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. 통영에서 이중섭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고,《4인전》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. 이 때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들이나 유명한 ‘소’ 연작들이 제작되었으며, 생애 최고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.

물고기와 아이들_1950년대_종이에 잉크 유채_27x39.5cm
황소_1953년경_종이에 유채_ 35.3 x 51.3cm

5부. 편지화

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졌다.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.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.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,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.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,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. 이중섭의 편지는 그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거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 한 기록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,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.

벚꽃 위의 새_1954년_종이에 유채_49 x 31.3cm

6부. 1954-55 서울

이중섭은 가족들과는 떨어진 채 홀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. 누상동,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, 1955년 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.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 업을 했으나, 중간 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.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, 개인전으로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.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점이나 팔렸으나,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 에 빠지기 시작한다. 서울 체류기에 제작된 작품, 미도파화랑 개인전에 출품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된다.

투계_1954-55년_종이에 유채_28.5 x 40.5cm

7부. 1955 대구

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. 절친했던 시인 구상(1919-2004)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. 이후 ‘가장’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“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”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,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.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,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. 이 때 제작된 작품으로 구상을 위해 그려준 <시인 구상의 가족>, 피를 흘리며 처절한 자신의 처지를 은유한 피 흘리는 <소> 등이 전시된다.

8부. 1956 서울(정릉)

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(1914~ ), 소 설가 박연희(1918~2008), 시인 조영암(1920~?) 등과 함께 생활했다.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, <돌아오지 않는 강>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.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, 간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. 작고 애잔한 정릉 시대의 풍경들 이 전시의 마지막을 구성한다.

찾아가는 길

부산시립미술관

(우 48060)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APEC로 58(우동)

TEL 051-744-2602

http://art.busan.go.kr

오류 및 정정신고 : info.misulgwan@gmail.com

300x50_ad_base1

X